야설

원수같은 해외 나들이 -단편

소라바다 210 11.16 12:28
지나간 일을 새삼스레 돌이켜보면서 변명해 봐야, 내 얼굴만 뜨거워지고, 방바닥에 누워서 천장 보고 침 뱉는 격입니다.

그러나 제가 겪었던 그 일로 인해서 내 인생이 너무 더럽게 꼬부라져 하소연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제 얘기를 듣고 나면 여러분들도 분명히 나를 나무랄 거에요. 멍청한 년이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그 일은 모두 제 탓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당연한 거 같아요.

 

요즘은 경기침체로 집안 살림이 주눅 들어 있는 형편이라 일반적인 서민들은 웬만해선 해외여행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죠.

그러나 몇 년 전에는 동남아 여행쯤 쉽게 갔었잖아요. 저도 그중에 하나였어요.

 

마음에 맞는 동창 하나가 경비 마련을 위해 동남아 여행계를 든다길래 저도 몸이 달아 끼어달라고 했어요.

 

아이들 다 키워 놓았겠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지만 발언권도 있는 형편이라 남편한테 의논할 필요도 없이 결정해 버렸어요.

물론, 그때 가서 여행 갈 형편이 못 되면 부었던 곗돈을 다른 데 유용하게 쓰면 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었지만요.

 

그럭저럭 곗돈을 다 붓고, 막상 여행 떠날 날짜가 가까워져 오니 막 안달이 나는 거예요.

꽁생원 같은 회사원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는 처지에 언감생심 나라 밖으로 나가는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가정주부였으니 제 가슴이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래서 한 달 전부터 비위를 맞추려고 남편에게 별별 아양을 다 떨었고, 가끔은 얘교 작전까지 펴 남편 허락을 받아내는 데 결국은 성공했어요.

 

드디어 5박 6일의 여행 일정이 시작되었어요.

그 전날, 마음이 너무 들떠 밤을 하얗게 새운 것은 물론이고, 남편과 의무 전까지 치르느라고 새벽에는 녹초가 되고 말았죠.

호호, 그 정도쯤은 힘들지 않더라고요. 난생처음으로 해외여행 가는데, 안 그래요?

 

여행 떠나는 아침에는 이런저런 당부를 남편이 하더라구요.

동남아로 여행 떠난 일부 사람들이 너무 방탕한 짓을 해대서 문제가 된다는 것과 가정까지 파탄이 나는 사례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경고성 엄포였어요.

 

저도 매스컴을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저한테 해당할 것이라고는 상상은 하지도 않았어요.

남편의 엄포성 경고와 우려에 괜히 내 자존심만 상하더라구요. 아내를 그렇게 믿지 못해서야 어떻게 부부라고 할 수 있겠어요.

 

동남아 여행을 경험해 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같은 동양권이라 그런지, 막상 다녀보니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더라고요.

더군다나 패키지여행이라 인솔자가 안내하는 대로 다녀야 해서 특별히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는 체험할 수도 없었어요. 사원 두어 군데, 그리고 도시 구경이나 하면서 쇼핑하는 것이 고작이었죠.

 

그 사람들 얼굴 생김은 우리보다 뭐 나을 것이 하나도 없고, 빈부 격차가 심해서 그런지 서민들은 훨씬 더 가난해 보이더라구요. 아마 그래서 일부 몰지각한 한국 관광객들이 우월감을 가지는가 봐요.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일행도 시간만 나면 쇼핑하기에 바빴어요. 어떤 친구는 마치 장사꾼처럼 물건을 사더라구요.

여윳돈이 많아 그렇기도 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견물생심 같더라고요.

 

탐 나는 토산품들이 많은데도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보석이나 무슨 약 따위를 사는 데만 혈안이 돼 있더라고요.

저는 준비해 간 돈이 워낙 적어 그딴 거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선물용 물건 몇 개 사고 말았어요.

 

말단 회사원의 아내로 길든 탓인가 봐요. 집에 돌아가면 써야 할 데가 많다는 걸 생각하니 선뜻 지갑 열 용기가 안 나는 거예요.

괜히 서럽기도 하구, 근데 나중을 생각해서는 참 잘했다는 자위도 들었어요.

 

돈 잘 버는 남편과 사는 여자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이런 저의 마음을 남편이 알기나 하려는지.

 

말단 회사원을 남편으로 둔 아내의 서러움은 그만 접어두겠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 그게 아니거든요.

 

어쨌든 여행 대부분을 윈도쇼핑이나 하고, 사진 찍고, 저녁에는 도심 유흥가로 나가 술도 한잔 마시고, 밤거리도 구경하면서 그렇게 일정이 마감되더라고요.

 

근데 문제는, 그렇게 어울려 다니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간덩이가 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처지를 깜빡깜빡 잊을 때가 많았지 뭐예요.

가끔은 다른 여자들보다 제가 한 수 더 뜰 때도 있었어요. 그동안 제 의식 속에 가만히 숨어있던 끼가 발동되어 괜히 객기를 부린 거겠죠.

 

그 어설픈 객기. 그게.

 

여행 5일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태국에 머물러 있었어요. 마음이 잔뜩 들떠 있는 상태에서 이국의 밤은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그 나라 특유의 음악, 쇼윈도의 반짝이는 불빛, 화려한 색상의 의상들,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리는 이국인들의 모습들이 환락의 거리와 어우러져 있는데, 마치 환상의 세계 속에 제가 서 있는 것 같았어요.

 

순간, 펑펑 울고 싶더라고요.

 

남편? 아이들?

떠올리기조차 싫었어요. 제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이 어쩜 그렇게 궁상맞다고 생각이 되는지.

 

그날 밤, 밤거리를 쏘다니며 술도 제법 많이 마셨어요. 저 나름대로 환상적인 이국의 밤을 맘껏 만끽하고 싶었겠지요.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너 나 없이 일행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만약 남편이 목격했다면 주저 없이 "미친년" 으로 치부했을 거예요.

 

가정주부가 술은 언제 배웠냐고요?

학교 다닐 때 이미 소주 두 병쯤은 거뜬하게 비운 경험이 있어요. 그 실력이 어디 가겠어요?

 

숙소로 돌아와 막 샤워할 준비를 하는데, 인터폰이 울려요. 같은 방을 쓰는 현숙이란 동창이 받았지요.

그녀가 수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얘기하더니, 갑자기 옷을 다시 입지 뭐예요.

 

[현숙아.]

 

[왜?]

 

[우리, 잠자러 여행 온 거 아니잖아 ]

 

[근데...?]

 

[로비에서 보자는 사람이 있어]

 

[누구? 아는 사람이야?]

 

[여기 프런트에서 근무하는 남자. 호텔 안에 좋은 바가 있는데 한 잔 사겠다고...아까 보니 우리 말을 유창하게 하더라구. 같이 나오라는데, 어때?]

 

[글쎄. 위험하지 않을까?]

 

[우리 둘이 가는데. 위험할 게 뭐 있으려고...기회에 외국 남자랑 어울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잖아? 이런 데서만 맛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 아니겠어?]

 

[....그래도..]

 

 

망설일 사이도 없이 이미 현숙이한테 이끌려 엘리베이터에 갇힌 몸이 되었어요.

 

저의 마음 한편에는 야릇한 흥분이 잔잔하게 흐르고요. 이런 끼가 제 속에 잠재해 있을 줄은 정말 저도 미처 몰랐어요.

로비에 내려오자, 눈이 부실 정도로 흰 양복을 입은 사내가 싱긋 웃으며 다가서는 거예요.

 

첫눈에 봐도 꽤 멋진 남자였어요. 전혀 태국인 얼굴 같지가 않고, 서양인 피가 섞인 혼혈이 분명하더군요.

우리 말을 잘해서,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없고요. 하긴 뭐, 호텔에 근무하면 3개 국어는 기본이라고.

 

아시잖아요. 동남아 쪽에 한국 관광객이 좀 많아요?

 

 

[우리나라에 오신 분들께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근데, 왜 우리를....?]

 

[여기 호텔에 투숙하신 고객님들 중에서 제일 아름다우세요. 두 분.]

 

[호호, 농담도 잘 하셔...]

 

현숙이와 저는 그의 친절과 매너에 이미 말려든 거예요.

 

남자는 프런트로가 잠시 전화를 걸더니, 우리를 지하로 안내했어요. 경계심이 들면서도, 다가올 일이 더 궁금하여 저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지요.

 

바는 한국과 별 차이 없었어요. 술도 마시고 한쪽에서 춤도 출 수 있게 돼 있더라고요.

 

남자가 양주 한 병을 주문하더니, 계산은 자기가 할 테니 걱정 말고 즐겁게 드시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 20분쯤 지났을까요? 갑자기 노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한 명 나타났어요.

흰 양복을 입은 사내가 그 남자를 소개하면서, 근처 호텔에 근무하는 자기 친구래요. 타국인데 그 남자가 어디에 근무하든 무슨 상관있어요.

 

그 남자도 우리 말을 잘했고, 좋은 인상이었어요. 체격이 더 좋아 보였고요. 속을 보지 않아도, 근육질이 분명할 것 같았어요.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남자를 바꿔 가며 춤도 췄어요.

회사원 아내 주제에 춤인들 제대로 배웠겠어요? 그냥 시늉만 내면서, 남자 품에 안긴 게 맞겠지요.

이국의 멋진 사내와 함께 술도 마시고 춤까지 췄으니, 기분이 괜찮더라고요.


술도 어지간히 마셨고, 시간도 자정이 훨씬 넘어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숙이 생각도 같더라고요.

근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면서 눈앞이 어찔해져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입술을 깨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이내 주저앉고 말았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객실로 안내하겠다면서, 그 남자들이 우리를 하나씩 맡아 부축하더라고요.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현숙이가 먼저 올라가라는 손짓을 해요.

저는 의식이 몽롱해서 그냥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어요.

 

저를 부축한 남자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으나, 숫자를 확인할 수는 없었어요.

남자의 신사적인 매너를 철석같이 믿었지요. 객실에 들어와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니까요.

 

웬일인지 현숙이는 그때까지 오지 않는 거예요. 비로소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친구는 어디 갔어요?]

 

[술기운 때문에 바람 좀 쏘이겠다고 했습니다. 곧 올 겁니다]

 

[걔 혼자서요?]

 

[염려 마세요. 파트너가 보호할 겁니다]

 

[그럼, 나 먼저 자야 하겠군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근데 그 남자가 샤워실을 좀 써도 되겠냐고 묻더군요. 저는 취중에도 의구심이 들어, 안 된다고 잘라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가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나가더군요. 다소 미안하긴 했지만, 당연히 그래야 하잖아요.

 

저는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알몸에 가운만 걸치고 침대에 누웠어요. 머리는 여전히 아픈데 잠이 사정없이 쏟아지더군요.

어쨌든 현숙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무심코 TV를 켰어요.

마침 영화를 방영하고 있었는데, 진한 정사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포르노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뛰면서 낯이 뜨거웠어요.

그래도 왠지 당장 끌 수가 없었어요. 하긴 뭐, 혼자 보는데 어떻겠어요.

 

보면 볼수록 포르노가 분명했어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에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숨결도 고르지 못했고요.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더군요.

 

당연히 현숙이라고 생각해 서슴없이 문을 열어줬어요. 근데 뜻밖에도 조금 전에 나간 그 남자였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가 성큼 들어서지 뭐예요.

 

여자가 알몸에 가운 차림이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무슨 일이에요?]

 

[친구분이 부인을 즐겁게 해드리래요/]

 

[....내 친구가 그런 말을 했어요?]

 

[녜...]

 

[그럴 리가 없어요. 어서 나가요. 안 나가면 소리 지르겠어요.]

 

[그러지 말고, 우리도 저들처럼 즐겨요]

 

그 남자가 TV를 가리키는 거예요. 브라운관에서는 여전히 베드신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저는 가운을 꼭꼭 여미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지요.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남자가 가운을 우악스럽게 벗겨버리더니 저를 침대에다 사정없이 던져버리지 뭐예요.

건장한 사내의 완력을 무슨 힘으로 당하겠어요.

 

저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몸을 동그랗게 굽혔어요.

그러자 그 남자가 갑자기 제 머리를 TV 쪽으로 돌려놓는 거예요. 화면을 보라는 뜻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웅크린 몸을 단단히 고수했어요.

 

소름 끼치는 기억이긴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건 오히려 남자가 행위를 하기 좋도록 도와주는 격이었어요.

 

제 엉덩이는 가볍게 들렸고, 그는 아주 쉽게 공격해 왔어요.

고백하건대, 그 순간만큼은 정말 불가항력이었어요.

마침 TV 속의 남녀도 우리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어, 저는 마치 포르노의 여주인공이 된 듯했어요.

제가 기진맥진해 있는 동안에도, 그는 연거푸 두 차례나 더 공략했어요.

그 남자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듯 저를 괴롭히더군요.

 

제 존재는 없어진 것 같았어요.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내 친구는 어디 있어요?]

 

[바로 아래층 객실에서 파트너와 즐기고 있어요]

 

[정말, 내 친구가 보내서 왔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즐거우면 되잖아요?]

 

[처음부터 계획적이었군요.]

 

[한국에서 온 여성 중에, 이렇게 즐기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요.]

 

[거짓말 말아요.]

 

[사실이에요.]

 

그러면서 그 남자가 저를 번쩍 안아 자기 무릎에 앉혔어요. 그리고는 자기 남성에다 저를 서서히 가라앉히는 거예요.

순간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껴안았고, 멍청하게도 시키는 대로 그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꼴이 되었어요.

 

현숙이는 그로부터 2시간 후에 나타났어요.

창백한 낯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몰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어요. 물에서 방금 건져낸 빨래처럼 축 늘어져 흐느적거렸어요.

옷매무새를 미처 단속하지 못해 블라우스 단추가 엇갈려 채워져 있고, 머리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꼭 머리채를 휘둘린 여자 같았어요.

저는 제가 당한 상황을 숨긴 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요.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나, 어떡하면 좋아?]

 

[혹시, 그놈한테 당한 거야?]

 

[.....너는?]

 

[나는 아냐. 그 놈이 어떡했는데?]

 

[너무 끔찍해서,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짐작하겠어. 그러나 너하고 나만 입 꿰매고 있으면 되니까, 잊어버려]

 

[남편을 무슨 낯으로 보니? 내가 어쩌다가....]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에요.

계속 훌쩍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제 마음이 갑자기 진정되는 거예요.

동병상련의 아픔과 수치심보다는 나 혼자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저를 편안하게 하는 거예요.

저, 정말 못된 여자지요?

 

여행에서 돌아온 저는 짐을 풀어 남편과 아이들한테 줄 선물부터 늘어놓았어요.

남편이 별일 없었냐고 물었어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냉수부터 들이켜야 했어요.

아무 일도 없었고, 생각한 것보다는 재미없는 여행이어서, 다시는 해외여행 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뭐니 뭐니 해도 내 집이 제일 좋고, 내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였지요.

저 정말 앙큼한 계집이지요?

 

남편이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거 봐, 내가 뭐랬어" 하고는, 제 등을 토닥거리지 뭐예요.

어찌나 미안한지, 마구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짐을 마저 푸는 가운데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나왔어요. 태국의 호텔을 떠나는 날, 자기 파트너가 주더라면서 현숙이가 건네준 것이었어요.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태국의 경치를 담은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무심코 받아 넣은 거라고요.

 

[엄마. 이거 무슨 테이프야?]

 

[응, 태국에 온 관광객들한테 하나씩 주는 거래.]

 

[틀어 봐도 돼?]

 

[그래, 마음대로.]

 

중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테이프를 넣고 VTR을 작동하는 동안, 저는 풀어놓은 짐들을 정리하느라 조금 바쁜 시간을 보냈지요.

남편도 그 비디오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소파에 앉더라고요.

 

비디오에서 음악이 흐르는 것이 들렸어요.

 

제가 세탁물을 들고 다용도실로 들어가는 순간, 남편과 딸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니겠어요.

이어서 남편이 고함을 치면서 "빨리 꺼!" 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납빛이 된 얼굴로 눈을 하얗게 뒤집더라고요. 딸아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기 방으로 사라졌고요.

 

[여보, 왜 그래요...?]

 

[어이구, 이 노릇을....]

 

[왜 그러지....?]

 

저는 리모콘을 집어 서둘러 VTR을 작동시켰어요.

 

[어머머? 어쩜...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태국의 경치가 아니라, 호텔 객실에서 그 남자와 제가 가졌던 행위 일체가 들어 있었던 거예요.

 

놈들이 관광객을 유혹하여 섹스를 즐기면서, 그 장면들을 객실 내에 설치된 "몰래카메라"로 찍어 테이프로 만든 것이 분명했어요.

후문에 의하면, 그런 테이프를 대량 복사해서 밀매한다는 거예요.

요즘에는 한국의 러브호텔에서도 그 같은 일이 벌어진다니, 대체 저는 어디까지 팔려나갔을까요?

 

저는 결국 이혼당해 집에서 쫓겨났어요.

지금은, 시골 아주 구석진 음식점에서 주방 일하며, 국밥이나 말아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태국에 가서 그놈의 목을 잡아 뺄 수도 없는 노릇 아녜요?

그래서 옛말에 유리그릇과 계집을 내돌리면 깨진다고 했나 봐요.

 

제 친구 현숙이는 어떻게 됐냐고요?

 

운이 좋았는지 다행히 위기에서 잘 빠져나왔어요. 테이프가 의심스러워 바로 내놓지를 않고, 나중에 혼자 봤대요.

내용은 역시 제 것과 같은 것이었고요.

 

결국 저만 개살구 먼저 터진 꼴이 되고 말았죠.

어이구, 원수같은 해외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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