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내 유일했던 여사친 얘기 -하편

소라바다 135 11.10 14:10
매주 목요일이면 있는 실험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시험준비한다 과제한다 피곤에 찌들은 몸을 끌고 돌아오는 길에

 

어둠을 이불삼아 드러눕는 해를 보고있으면

 

나도 같이 드러눕고 싶은 기분이다.

 

 

 

 

 

원래대로라면 꽤 여러번 실험을 반복해 그 결과의 평균치를 찾아야했지만

 

융통성있게 한번만하고 대충 나머지값은 그 언저리에 맞게 지어내면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실험이였다.

 

 

 

몇달째 매주 있는 수업도 지겨웠지만 제일 지겨운건

 

그 몇달째 융통성은 개나주고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조장이였다.

 

 

 

나에게 겉으로는 동의를 구하는, 속으로는 동의를 강요하는 조장의 물음에

 

나는 눈치가 없는척 그냥 한번만하고 끝내도 되지않을까

 

웃으며 조심스레 되물었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그렇게 조장이 원하는대로 모든 실험을 끝마쳤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강의실을 나오는데

 

저만치 앞에 걸어가는 조장이 보였다.

 

 

 

'니 열정 반만 덜어서 나좀줘라...'

 

 

 

불평을 차마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계속 속으로 곱씹기만 하고있는 나였다.

 

이렇게 하면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풀릴까 계속하다가

 

이내 주린 배만 더 고파와 그짓도 그만두었다.

 

 

 

방에 도착하니 룸메란 놈은 팔자좋게

 

외국인들이 득실거리는 이 건물에서

 

단소를 불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뜬금없이 단소타령할때부터 설마 진짜 가져오겠나 했는데

 

소리도 못내는 단소를 턱에 자국날때까지 붙들고 있는거보면 얘도 진짜 또라이다...싶었다.

 

 

 

 

 

최근에 버릇이 하나 생겼다.

 

단소처럼 물건이 됐든,

 

말 한마디가 됐든,

 

나에게 익숙하다면

 

그것은 매개체가 되어서 나에게 옛날기억을 불러왔다.

 

 

 

추억이라 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도 현실도피라는걸 알고 있다.

 

앞을 보면

 

무한한 일분 일초가 점차 현실이 되어 목을 졸라오는게 버거워

 

추억이라는 벽 뒤에 숨어 과거를 떠올리며 멍하니 있는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청승떠는거같아 머리를 비워내도

 

다시금 머릿속은 꽉 채워지고

 

그러면 잠시나마 피곤하기만한 지금이 잊혀져서

 

그 안락함을 곧 즐기게된다.

 

 

 

 

 

 

 

 

 

 

 

 

 

 

 

 

 

 

 

"단소 연습 많이 했어?"

 

아침인사를 건내려던 나보다 앞서 유진이가 말했다.

 

 

 

"그냥 대충. 너는?"

 

 

 

"나는 완전 밤늦게까지 했지!"

 

 

 

"민폐잖아..."

 

 

 

"아, 소리가 안나서 괜찮았어."

 

 

 

소리도 못낼꺼 뭐하러 밤까지 연습했냐고 핀잔을 줬지만 속으로는 웃고있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웃기더라ㅋㅋ

 

너무 태연한 표정으로 소리도 못냈다고 말하는데

 

벙쪄서 할말은 없고 웃음만 새어나왔다.

 

 

 

"왜 웃냐? 니는 단소 잘부냐?"

 

자기도 말해놓고 웃겼는지 실실 웃으면서 나에게 따져왔다.

 

내가 대답은 안하고 계속 웃기만 하자,

 

유진이는 제멋대로 오늘 수행평가 더 못보는쪽이 떡볶이를 쏘자며 먼저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새학기의 교실은 어색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많이 불어봤던 익숙한 단소도

 

익숙하지 않은 교실에선 괜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뭐 하나라도 낯설면 전부터 익숙해져있던것도 같이 낯설게 느껴버리는 이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리고 결국 이날 수행평가는

 

서로 너보다는 잘볼거라며 우기던 유진이와 사이좋게 같이 말아먹었다.

 

 

 

귀찮다며 튕기던 나를 유진이는 기어이 떡볶이집에 데리고 갔다.

 

사실 정말 먹고싶은 기분이 아니였다.

 

잘해야된다는 생각이였는데 첫 수행평가부터 망쳐버렸으니

 

그날 학교에서 내내 꽁해있었다.

 

 

 

떡볶이에 순대에 튀김에

 

다 시킨줄 알았는데 지가 다 먹을꺼였는지 나보고

 

"넌 안시켜?" 물어봤다.

 

그러고는 지도 쪽팔렸는지 입을 가리며 깔깔 웃어댔다.

 

 

 

한참 먹다가 유진이가 나에게 물어왔다.

 

"니근데 오늘 왜 하루종일 꽁해있냐?"

 

 

 

티가 났나 살짝 당황했지만서도 이유는 말하고싶지 않았던 나는

 

"먹던거나 마저 드시지?"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유진이는 대답을 강요하는 눈빛으로 내 옆자리로 오더니

 

계속 얼굴을 들이밀었고

 

나는 마지못해 털어놨다.

 

 

 

"아 첫 수행평가부터 말아먹었잖어."

 

 

 

"근데?"

 

 

 

전혀 개의치않는 모습이였다.

 

지는 잘본거면 모를까 나보다 더 못해놓고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데

 

순간 내 동생이 겹쳐보였다.

 

어렸을때부터 나와 달리 뭘하든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

 

어느 순간부터 시험을 망쳐와도 신경도 안쓰더라.

 

그래서인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버렸다.

 

 

 

"니도 참 생각없다."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그냥 동생의 귀여운 점이 겹쳐보여서 속없다는 식으로 말한거였는데

 

명백한 실수였다.

 

순간 움찔해서 유진이를 쳐다보니

 

유진이도 먹다말고 나를 뻔히 쳐다보고있었다.

 

그러더니 곧 피식 웃었다.

 

 

 

"야"

 

 

 

"응?"

 

눈치보며 작게 대답했더니

 

 

 

"하루종일 음악 수행평가 하나 망쳤다고 죽을상이였냐?"

 

 

 

"...."

 

 

 

"누가보면 수능본줄 알겠네ㅋㅋ 그거 하나 망친다고 안죽어 임마. 다음에 다른거 잘보면 되지. 미련스럽긴ㅋ

 

나봐라? 오늘 망쳤어도 열심히 노력은 해보고 망친거니까 신경안쓰잖아?

 

다음부터 잘하면 되지 빙구야ㅋㅋ"

 

 

 

분명 방금한 말실수가지고 뭐라할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유진이는 아빠나 해줄법한 말을 나에게 했다.

 

신기한건 내가 이때 유진이한테 받았던 느낌은

 

철없는 어린애가 어찌되든말든 신경안쓴다는게 아닌

 

사소한 일에 기죽지않고 기운내서 벌써 앞을 보고있는

 

나한테서는 전혀 찾아볼수없는 느낌이였다.

 

 

 

"근데 너 방금 나한테 살짝 미안했지?"

 

 

 

멍해있던 나한테 유진이가 물었다.

 

그리고 잠시 잊었던 말실수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눈을 피하자 유진이는

 

 

 

"그니까 계산은 니가해?"

 

하고 내 등을 떠밀었다.

 

 

 

분식집을 나와서 다시 집을 향했다.

 

좀 조용히 걷는다 싶더니 유진이가

 

 

 

"근데 나 방금 좀 어른스럽지 않았어?"

 

하고 물었다.

 

 

 

이런애한테서 어른스러움을 느꼈던 나는 도대체...라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계속 걸으니

 

옆에서 계속 누나라고 불러보라며 앵겨왔다.

 

 

 

그런 유진이 말은 들은채 만채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다음에 잘보면 되지."

 

 

 

이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 우리 바이오(Bio=생물) 점수 나왔더라?"

 

오래된 영화처럼 꽤나 한참 재생되던 기억은

 

느닷없는 목소리에 퍼즈가 걸렸다.

 

 

 

별의미없이 던진 룸메의 한마디가

 

벽을 깨부수고 그 뒤에 숨어있던 나를 다시 지금으로 끄집어온다.

 

 

 

삼일밤낮을 꼬박 세워 몇백장 가까이되는 피피티를 다 외워갔다.

 

조금 망설이다

 

이내 어차피 보게될 점수라며 스스로를 재촉해 마우스를 꾸욱 누른다.

 

72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는 이내 창을 꺼버렸다.

 

 

 

'.....

 

삼일을 잠안자고 공부만 했는데 나온 점수가 72...

 

만약 잘꺼 다자고 먹을꺼 먹어가며 공부했다면 몇점이 나왔을까

 

기대한건 아니였지만 72점이라니...

 

B도 아니고 C다'

 

 

 

또 누군가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누굴 원망해야할까?

 

시험을 뭣같이 어렵게 낸 교수?

 

나보다 공부도 덜한거 같은데 정작 점수는 나보다 더 잘나온 룸메?

 

다 틀렸다.

 

결국 내가 시작한 원망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최악은 아니다.

 

남의 탓으로 돌려 열등감에 찌들어 추해지느니

 

자책하는쪽이 백번 낫다.

 

 

 

그리고 자책은 또다시 나를 짓밟기 시작한다.

 

 

 

'한번도 내가 똑똑하다 생각한적은 없었다.

 

그래도 중간은 간다고 생각했어.

 

삼일을 세워서 공부해갔는데 평균보다 점수가 안나왔는데? 중간?'

 

 

 

아침에 수업가던길, 아빠한테서 온 문자가 떠오른다.

 

'아들, 삼천불 더냈다. 이번학기 학비 다냈네.'

 

 

 

또 큰 돌하나가 눌러앉는 느낌이다.

 

'자그마치 삼천.

 

삼백도 아니고 삼천.

 

도대체 왜 이 돈을 날 위해 쓰나.

 

학점관리는커녕 이정도 성적이면 장학금이 취소되진않을까 걱정하고있는 버러지같은 나때문에

 

도대체 왜 이 돈을 쓰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답을 보낸다.

 

 

 

'고마워. 열심히 할게'

 

 

 

그러다 문득 방금전 했던 생각이 났다.

 

 

 

'다음부터 잘하면 되지 빙구야ㅋㅋ'

 

 

 

꽤나 인상깊었는지 몇년전 말인데도 아직도 토씨하나 안틀리고 기억난다.

 

 

 

'지금 너가 옆에 있다면 넌 나에게 똑같이 저렇게 말할까?

 

스무살이 넘은 나는 아직도 14살때의 너보다 어리구나...'

 

 

 

여러모로 우울한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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