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내 유일했던 여사친 얘기 -상편

소라바다 286 11.10 14:09
어른이 된다는 시점의 경계선을 모르겠다.

 

말귀를 알아들을때부터 늘 함께였던 잔소리를 근래에도 듣자하면 주된 내용은

 

이제 어른이니 나잇값좀 하라는거다.

 

지나치다고하면 지나칠, 다른애들에 비하면 약과라고하면 그렇다고도 할수있는 사춘기를 보내고

 

나는 스무살이 되었다.

 

 

 

나잇값을 할정도의 어른인가 내가?

 

아니더라.

 

어른이 된다는건 게임에서 레벨올리면 자연스럽게 전직하듯 되는 그런게 아니였다.

 

몸만 훌쩍 커버렸지 생각하는건 하나도 변한게 없었고

 

갑자기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지니 오히려 불안했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은 고민이 생기면

 

그 고민이 지속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답을 찾아 나아가는 그런 모습이였으니

 

지금의 나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던 어른과는 거리가 멀다.

 

많이 멀다.

 

 

 

최근 들어서 이런 고민은 더 진지해져갔다.

 

잘하는것도 하고싶은것도 특별히 없었기에 그냥 나중에 생겼을때

 

그때가서 엄마아빠한테 손벌리지않게 돈이라도 많이 벌수있는 진로를 택하자는 생각이였다.

 

그렇게해서 선택한 길은 의대였다.

 

 

 

비참했다.

 

전공과목도 아니고 고작 1학년 2학기에 듣는 생물에서 말도안되는 성적을 받았고

 

겁이 났다.

 

 

 

'길을 잘못 선택했나?

 

재수강을 해야겠지. 근데 재수강을 한다한들 지금보다 나은 성적이 나올까?

 

열심히는 한거같은데?

 

진짜? 정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혀놓을때 한가지 들었던 확신은

 

내 동기는 너무 보잘것없었다.

 

정말 의사가 되고싶다던 친구는 남들 대학갈때 혼자 밤까지 학원다니며 삼수까지하기로한 친구의 각오에 비하면

 

단순히 돈많이 벌고싶어서 의사가 되고싶다 생각했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진짜 한심했다.

 

성적이 떨어질수록 의욕도 같이 없어져갔고, 없어진 의욕은 또 성적을 끌어내리는 악순환의 반복이였다.

 

 

 

 

 

최근에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셨다.

 

회사가 조만간 망할것같다는게 이유였다.

 

다행히 얼마안가 새 직장을 찾으셨지만, 전보다 월급은 많이 줄었고

 

올해 대학가는 동생 뒷바라지까지 하려면 타주라도 가서 일해야하나 생각한다고 하셨다.

 

 

 

그나마 미국이니까 얘기라도 꺼내볼수있는거였지 한국이였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한국이였다면 진작에 정년퇴직하시고 치킨집이나 차리셨을 연세신데

 

타주까지 나가서, 그것도 우리 뒷바라지때문에 그러신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해진 4년안에 졸업해도 나갈돈이 한참인데

 

지금의 나는 전공을 바꿔야하나 고민하는

 

이 성적으로는 의대는커녕 졸업도 못할 그런 꼴이였다.

 

 

 

가끔 저녁을 먹으면서 회사에서 부하직원때문에 골때린다는 얘기를 들으면

 

웃으면서도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져갔다.

 

'저런 꼴 봐가면서도 나때문에 돈벌러 회사에 가는데...'

 

한심한 내꼴을 보자하니 날이갈수록 속에 돌이 하나둘씩 눌러앉는 느낌이다.

 

 

 

 

 

혼자서 이런 고민들을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자면 꼭 그 애 생각이 난다.

 

조금은 웃기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털어놓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대느라

 

생전 안나던 코피도 주륵주륵 나고

 

샤워하고 나오면 머리카락이 수북하니 빠져있기도한데

 

얘기를 들어주기는커녕 얼굴조차 보지도 못하는애를

 

혼자서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 어떡하지? 너라면 어떻게 했을꺼같냐?

 

니가 봤을때는 나 어른같긴하냐? 아니면 어른이 되는 과정인건가?'

 

물어보고 있는 내꼴은 심히 추하다.

 

 

 

 

 

초등학교때 처음 만났던 얘랑 정작 처음 말해본건 중학교때였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서 중학교를 입학했고

 

소심한 성격탓에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수업시간마다하는 자기소개마저 고역이였다.

 

그렇게 첫날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데

 

한 여자애가 자꾸 내쪽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처음 한두번이야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자꾸 내쪽을 보니 의식을 안할수가 없었다.

 

 

 

'익숙한데?'

 

 

 

어디서 본 얼굴이였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생각이 났다.

 

유진이였다.

 

초등학교때부터 논술 수업도 같이듣고 엄마들끼리도 친한 그런사이였다.

 

그렇다고 우리끼리 친한건 아니였다.

 

꽤나 오래같이 논술도 하고 했는데 그때는 말한마디를 안섞어봤네ㅋㅋ

 

 

 

낯가림이 심한 성격탓에 사람사귀는것도 어려워하고

 

먼저 말안걸어주면 끝까지 대화한번을 안하는 성격이

 

지금도 여전하니 그때는 오죽했을까

 

 

 

그래도 모르는 애들 사이에 끼어있자니 죽을맛이였는데

 

묘하게 동질감도 느껴지고 자꾸 내쪽을 보는것도 보아하니

 

'얘도 아는애도 없는데 아는 얼굴만나니 반가워서 아는척이라도 할려는거겠지?' 싶어

 

내가 먼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순간

 

"안ㄴ..."

 

"저기 내친구랑 자리좀 바꿔줄래?"

 

 

 

자연스럽게 책상째로 들고 일어나서 개빠르게 자리 바꿔줬다.

 

아니 존나 어색했다.

 

짐만 옮기면 되는데 왜 븅딱같이 책상째로 들고 일어나서 어기적어기적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개쪽팔린다 진짜

 

 

 

역시나 가시나들도 '아니 뭐하러 책상째로...'하는 표정으로 키득거리길래

 

개쪽팔려서 자리에 앉아서 가정통신문 열심히 읽는척했다.

 

키득거리는 소리 애써 못듣는척 가정통신문 정독하고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자존심이 좀 상하네?

 

아니지. 조오오오온나 상하네?

 

나는 그래도 쟤 이름은 아는데, 쟤는 내이름도 몰라?

 

내이름이 저기야? 내얼굴 알잖아?

 

아니그리고 고맙다 안하냐?

 

내가 느그들 자리바꿔주는애야?'

 

 

 

이렇게 혼자 열심히 찌질대고 있는데 날 쿡쿡 찔렀다.

 

 

 

'그치? 나알지?

 

왜 모르는척해ㅋㅋ 알면서

 

빨리 고맙다해'

 

 

 

라고 생각하며 애써 삐져나오는 웃음참으며 돌아보니

 

선생님이 쓰레빠신고온시끼들 앞으로 나오라며 나를 쿡쿡 찌르고 계시길래

 

침착하게 일어나서 세대 맞고 기어들어왔다.

 

 

 

상큼하게 세대맞고 시작한 아침조회시간...

 

자기소개하느라 시간다까먹은 1교시...

 

영어로 자기소개하는 영어시간...

 

주기율표주고 자기와 어울리는 원소에 빗대어 자기소개하는(?) 과학시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수학자에 빗대어 자기소개하는(???) 수학시간...

 

밥이 코로 넘어가나 입으로 넘어가나 모르겠던 점심시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또 자기소개만 했던 5,6,7교시가 지나고

 

첫날이 끝났다.

 

 

 

아니나 다를까 하굣길도 혼자였다.

 

 

 

'중학교라는건 자기소개를 존나게 잘해야되는곳이구나...

 

그나저나 쟤는 나 기억안나나?

 

아무리 6학년때는 거의 안마주쳤다지만 그래도 몇년을 같이 수업도 듣고했는데...

 

아니 근데 내가 개쑥맥이라 말한마디 안해봤는데 쟤가 뭐가 아쉽다고 이제와서 나한테 인사를 해줘?

 

나도 진짜 병신인가?

 

아니 뭘 또 이런거가지고 병신씩이나;;"

 

 

 

한참을 개찌질한 나와 덜찌질한 내가 안에서 투닥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동무를 슥 걸어왔다.

 

 

 

"너도 진짜 애지간하다;;

 

아니 어떻게 몇년동안 알고지내면서 말한마디를 안걸어?

 

더군다나 학교에서 아는거 나밖에 없으면서?"

 

 

 

당황스러웠다. 유진이였다.

 

이때가 진짜 얘랑 처음 말해본거였다.

 

 

 

'이번에는 그래도 같은반이니 한두번 말은 해볼려나?

 

한두번정도는 그래도 몇개월 지나면 어쩔수없이라도 하지 않을려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진짜 훅 치고 들어왔다.

 

얼굴에 저 당황했어요 쓰고 우물쭈물하고있으니

 

알만하다라는 표정으로

 

"너도 너다ㅋ"

 

 

 

그뒤로는 정말 쉬지않고 떠들어댔다.

 

아, 물론 얘 혼자.

 

우리 엄마는 잘계시냐는둥

 

처음 내 목소리 듣는거같은데 신기하다는둥

 

자기도 이 아파트 사는데 너는 몇동이냐는둥

 

친하지도않은애랑 이러니저러니 떠드는게 별로 안내켰던 나는

 

그냥 대충 대꾸했다.

 

그러다 내가 시큰둥하다는걸 느꼈는지

 

곧 조용해졌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속에서 같이 걷다가 이내 집앞에 도착했을때

 

기분이 나빴을까 살짝 신경쓰여서

 

 

 

"잘가"

 

 

 

하고 짤막하게 인사를 건냈다.

 

 

 

유진이는 내가 인사할꺼라고는 생각못했는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이내 살짝 웃어보이더니

 

 

 

"여기살아? 그래 잘강!"

 

 

 

하고 내가 들어가는걸 굳이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정환아!"

 

 

 

부르길래 뒤돌아보니

 

"나 옆옆동 사는데 내일 학교 같이갈래?" 했다.

 

 

 

뭐지 싶었지만 거절하기도 뭐해 그러자했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유진이랑 같은반이라며?" 했다.

 

 하여튼 아줌마통신은 이때도 기가막히게 빨랐어.

 

 

 

어쩜 너는 애가 몇년을 알고지낸애랑 말한마디를 안하니

 

이번에도 걔가 말 안걸어주면 끝까지 말안할꺼니

 

초등학교때는 그래도 애들이 착해서 니 성격에 친구는 많았다만 중학교는 다르다니

 

유진이한테 먼저가서 인사하고 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랬을리가 없을꺼라니

 

끊이지않는 잔소리에 짤막하게

 

 

 

"했어"

 

 

 

하고 끊었다.

 

 

 

"뭘?"

 

"인사도하고 얘기도했다고 걔랑"

 

"어머 진짜? 유진이가 먼저 했지?"

 

"...."

 

 

 

맞는말이라 대꾸는 못하고 또 잔소리는 이어지겠구나 하던 찰나

 

엄마 핸드폰이 울렸다.

 

 

 

다행히 유진이아줌마가 거신 전화였다.

 

아줌마들 통화야 길어질게 뻔하니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렇게 하루종일 게임이나 좀 끄적거리다보니 어느덧 밤은 깊었고

 

쌀쌀한 봄날씨에 아파트가 중앙난방이였던지라 거실에서 전기장판 켜고 엄마랑 동생이랑 셋이 드러누웠다.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일 왜 같이 가자는거지?

 

걔도 친구 별로 없나?

 

아닌데? 오늘 보니까 개많던데.

 

설마?

 

나 좋아하나?

 

아까 내가 개시크하게 잘가 했는데

 

왜 웃었지? 진짜 좋아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병신같다.

 

단순히 등교같이하자는애 말에 미친 전개속도로

 

이대로 두시간만 주면 혼자 출산계획까지 세울듯한

 

이때의 내가 나도 존나 소름끼치게 싫다;;

 

이렇게 혼자 김칫국 들이퍼마시는데 엄마가

 

 

 

"유진이랑 같은반이니까 어때? 좋지?"

 

 

 

"좋을게 뭐있어"

 

 

 

"으이구 좋으면서"

 

 

 

진짜 귀신이다. 어쩜 저 타이밍에 저런말을 하나 지금 쓰면서도 어이가 없네ㅋㅋ

 

 

 

"엄마가 너 또 친구 못사귀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을까봐 유진이한테 부탁좀했어. 잘했지?"

 

 

 

하... 이거였다.

 

아싸새끼 엄마가 자기 아들 잘좀 부탁한다고했던건데

 

이거에 방금전까지 내가 하던 생각이 겹쳐지니 쪽팔려서 웃음이 줄줄 새어나왔다.

 

 

 

"왜웃어?"

 

 

 

"엄마, 오빠 유진이누나 좋아하나봐"

 

 

 

"꼴에?"

 

 

 

"그러게;;"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우리집에 내편은 없었다.

 

 

 

"유진이가 그리좋으면 나는 우간다에 갖다팔고 유진이 키워 그냥"

 

그러자 동생이

 

"우간다는 뭔죄임?" 하길래

 

한대 후드러패고 엎어져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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